티스토리 뷰

목차



    반응형

     

    이번 글에서는 이탈리아 미래주의, 합리주의를 이끈 대표 건축가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이탈리아는 당시 특수한 정치 상황이 있었기 때문에 주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20세기초 이탈리아 미래주의

    20세기초 이탈리아에서는 다론코(D'Aronco), 솜마루가(G. Sommaruga)에 의해서 자유주의 건축이 소개되었습니다. 이것은 추상 장식과 고전 건축의 단순화를 추구했던 영국, 오스트리아와 유사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자유주의 운동은 경제적으로 안정된 밀라노, 코모, 토리노를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계속적인 산업화의 영향으로 새로운 시대의 생산 방식 및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 등을 주장하는 전위적 이념인 미래주의가 탄생되었습니다. 미래주의의 대표적 이론가들 중에는 보쵸니, 산텔리아, 노베첸토가 있었습니다. 보쵸니(U. Boccioni)는 일찍이 도시적 차원의 문제들, 소비 사회와 밀접한 대중적인 건축에 관하여 연구했습니다. 산텔리아(A.Sant'Elia)는 미래주의의 혁명적 사상을 건축 분야에 도입하였고, 치아토네(M. Cniattone)와 함께 미래도시의 건축적 실체를 꿈꾸었습니다. 기계에 대한 미학적 접근으로 새로운 기념비적인 건축디자인을 추구하였습니다. 이런 미래주의 작가들의 활동들은 새로운 시대의 건축적 요구를 찾으려는 면에서 이탈리아 건축에 있어서 모더니즘 건축의 출발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노베첸토(Novecento)는 산텔리아 등의 미래주의는 이탈리아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자국의 부흥 운동으로써 고전주의를 표방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습니다. 고전적 전통으로의 회귀 현상이 여러 분야에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상황에서 1920년대에 건축가인 죠반니 무찌오(G. Muzio)가 밀라노를 중심으로 노베첸토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초기의 노베첸토 운동은 고전 건축 어휘들을 단순 기하학적인 형태의 도형으로 변화시켜 장식적 요소로 사용하였습니다. 무찌오는 지중해 연안의 고전주의적 형태를 미래주의 미학을 대신할 수 있는 요소로 보고 '질서로의 복귀'를 주장하였습니다. 무찌오 등의 노베첸토 그룹은 전통과 근대화의 긴장 관계 속에서 고전과 모던의 융화를 끊임없이 시도함으로써 이후 이탈리아 건축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그룹 7 (Gruppo 7)

    그룹 7은 1926년 밀라노 공대를 졸업한 7명의 건축가 "테라니(G. Terragni), 라바(C. E. Rava), 라르코(S.Larco), 프레테(G. Frette), 피지니(L. Figini), 폴리니(G. Polini), 카스타뇰리(V.Castagnoli)"가 주축이 되어 결성된 조직입니다. 1920년대 들어서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모든 경제, 문화, 예술 상황이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무솔리니는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이탈리아 고전에 의해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였습니다. 도한 르 꼬르뷔지에의 새로운 정신(Esprit nouveau)에 관심을 가졌고, 전통을 수용하는 입장에서 논리와 합리성의 밀접한 관계를 갖는 모더니즘 건축을 추구하였습니다. 근대적 수법을 통해서 전통을 표현하려고 시도함으로써 동시대의 독일이나 프랑스와는 구별되는 건축적 성향을 확립하려고 했습니다. 1928년에는 제1차 합리주의 건축전, 1931년에는 제2차 합리주의 건축전과 제3회 그룹7 전시회를 개최하였습니다. 비록 1920~1930년대의 파시즘 시기에는 건축이 정치 논리에 좌우되기도 했지만 건축 발전에 다양한 시도들이 행해졌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당시 합리주의라고 알려져 있던 일반적인 건축은 정확히 말해서 이탈리아적 모더니즘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 합리주의 건축가 사르토리스

     

     

    M.I.A.R (이탈리아 합리주의 건축운동)

    근대 이탈리아 합리주의 건축운동(Movimento Italian per I'Architettura Razionale)은 1930년대에 이탈리아 내부적인 상황과 더불어 새로운 국제적 질서에 동참하기 위하여 조직되었습니다. 주요 구성원들은 Gruppo 7과 발데사리(L. Baldessari), 리돌피(M. Ridolfi), 사르토리스(A. Sartoris) 등이며, 지오 폰티(G. Ponti)가 있었고, 그들이 이탈리아 합리주의 건축에 이론적 뒷받침을 해주었습니다. M.I.A.R의 초기 건축 선언에서 그들은 무솔리니 정권에 협력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운동의 주축이 되고 있는 리베라, 발데사리, 리돌피, 사르토리스의 건축은 당시 국제적 흐름에 버금가는 모던적 성향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주장한 주요 건축적 주제는 "투명성의 추구, 질서, 재료 사용의 솔직성" 등이 있었습니다. 알베르토 사르토리스(1901~1998, 스위스)는 이탈리아 합리주의의 선구자 중의 한 사람으로 70여 개의 계획안과 1,300여 개의 기사를 발표하였고 합리주의에 대한 책도 여러 권 발간하였습니다. 이런 면에서 사르토리스는 진정한 이론가이자 계획설계와 실시설계에 있어서 진정한 건축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엑소노메트릭(3D) 드로잉도 꽤 잘 알려져 있으며 New York 5 등에도 많은 영향력을 끼친 있는 건축가입니다. 그는 1920년대부터 다양한 국제적 전위예술운동(avant-garde movement)에 참여하였다. 그는 1921년 제네바에서 미래주의 전시회에 참가하였고, 데 스틸(De Stijl) 작가 반 도스버그(Theo van Doesburg)와 협력 작업을 수행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C.I.A.M. 창설자 중의 한 사람으로 당시 국제적 흐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