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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이번 글에서는 근대건축가 안토니오 산테리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가 주장한 근대건축사상인 미래주의에 대해서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근대건축가 안토니오 산텔리아
오늘 살펴볼 이탈리아의 근대건축가 안토니오 산텔리아(Antonio Sant'Elia)는 미래주의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안토니오 산텔리아는 아주 짧은 인생을 살다(1880~1916)가 인생을 마감했지만 그는 유럽 도시 문명과 당시 예술적 기류에 대항하는 "비현실인 도면들(visionary drawings)" 수 백 작품을 남겼습니다. 안토니오는 기술에 심취한 나머지, 무자비하게 파괴되어 버릴 헌 도시 위에 새 도시가 지어지는 강렬한 이미지들을 낭만적인 모습으로 그려냈습니다. 안토니오 산텔리아는 또 다른 이탈리아 미래주의자(시인)인 마리네티(Marinetti)처럼, 이탈리아가 그 나라의 역사적인 꿈, 전통주의(academicism), 고전주의(classicism)에서부터 깨어나기를 바랬습니다. 이탈리아가 이제 더 이상 옛 구습에 근거하지 않고, 다만 근대(modern)의 기술과 과학을 바탕으로 다시 서길 바랬습니다. 새 예술과 건축에 부여되었던 힘찬 산업의 힘을 바탕으로 급진적인 근대(modern)로 변환되기를 바랬습니다. 안토니오 산텔리아가 당시에 추구했던 나라는 미국이었고, 미국이 유럽 어느 나라보다 더 뛰어나고 진보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마리네티(Marinetti) 보다는 덜 급진적이었지만, 안토니오 산텔리아는 열렬한 민족주의(ardent nationalism)자였습니다. 그의 인생 후반부에는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부의 무솔리니(Mussolini)의 정책을 지지하던 급진 세력에까지 속했습니다. 그때에 무솔리니의 파시즘은 대중들에게 진보적으로 보였었고, 그것은 대단히 인기 있는 사조였습니다. 당시 이탈리아가 쇠퇴해 가는 상황에서 대중들에게 나라를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힘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파시즘이 그렇게 빨리 그 많은 유럽나라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사실이 그 당대의 인기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 당시 무솔리니 정권의 성과는 (이탈리아의 불행 대부분을 야기한 전체주의의 지도자로 평가되는 오늘날과는 달리) 국민들에게 아주 믿음직하게 여겨졌습니다.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1914), 안토니오 산텔리아는 그의 장대하고 공상적인 계획들"Citta Nuova (신도시)"를 밀라노에 전시했었습니다. "Futurist Manifesto-미래주의 선언문"도 이때 함께 발표되었는데, 그것은 이탈리아 문화의 근간 대부분을 공격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안토니오 산텔리아는 이런 식으로 건축에 새로운 혁명을 일으키기를 제안했던 것입니다. 그의 도면들은 미래도시, 산업도시를 보여줬고, 그 상상의 격렬함은 너무나 강한 나머지 프랑스 건축가 토니 가르니에(Tony Garnier)의 "Cite Industrielle (산업 도시)"가 오히려 상대적으로 평화롭게 여겨지도록 만들습니다. 안토니오 산텔리아의 도면들은 "거대한 다리와 타워, 공항, 역, 공장, 고가 고속도로, 엘리베이터, 크레인" 등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기계적이고 기술적인 모든 것은 시적인 상상력의 수준을 높였습니다. 인간은 점차 노동자로써의 역할이 줄어들고, 감정, 역사성, 지성을 잃게 될 것으로 기대했었습니다. 안토니오 산텔리아의 이런 혁명적인 생각에는 그 어떤 부드러움도 없었습니다.
안토니오 산텔리아의 미래주의
1800년 대, 기능주의와 함께, 근대(modern)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기능주의 건축의 창시자로 불린 아돌프 로스(Adolf Loos)의 근대건축의 원칙은 당시의 건축이 미래를 향할 수 있도록 마중물 역할을 했습니다. 로스(Loos)로부터 영향을 받은 대부분의 건축가들은 "건축은 객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건축가는 미리 그 내용과 형태를 규정지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문화와 기술적인 배경으로부터 건축을 나타내야 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돌프 로스는 (20C 초의 다른 인내심 없는 예술가와 비교해 보면) 근대건축 흐름에서 상대적으로 온건 혁명가에 속합니다. 여기에서부터 근대건축의 미래주의 사조가 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건축가, 예술가들은 퇴폐적, 폭력적, 무정부적, 혁명적인 경향을 띄면서 정치적인 침체와 비슷한 쇠퇴의 국면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미래주의자들의 유일한 희망은 유럽 문명의 근간을 파괴하고 최근의 기술적이고 과학적인 발전 영역에 기초한 새로운 질서를 증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안토니오 산텔리아의 이러한 건축이념은 그 시대 역사와의 어떤 것, 어느 누구와도 어울릴 수 없었기에 그의 건축사상은 근대건축의 영역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러시아 구성주의"와 비교해서도 러시아 구성주의 혁명이 오히려 온화해 보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그는 외로운 공상가였고, 사상가였습니다. 그의 천재성은 짧은 시기동안 번성하였습니다. 아쉽게도 그에게는 그의 꿈을 입증할 수 있는 그 어떤 건축물도 지을만한 시간이 없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의 전시 상황에서 전투 준비를 명령받아 군대에 입대해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살아 있을 때처럼) 생을 마감할 때도 온갖 비난을 가득 안고 돌아갔습니다. 만약 그가 조금 더 오래 살았더라면, 또 다른 평가가 있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아마도 그의 운명은 (그가 그리도 경멸했던 타협에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도록) 그를 도운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