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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글에서는 근대건축가 아돌프 로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아돌프 로스는 근대 모더니즘의 창시자라고 불릴 수 있을 만큼 근대건축에서는 입지적인 인물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아돌프 로스의 생애와 그의 건축 철학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아돌프 로스의 생애

    근대건축가 아돌프 로스

     

    오스트리아 건축가 "아돌프 로스(Adolf Loos, 1870~1933)"는 석공의 아버지를 둔 노동자 계층 출신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는 당시 우아하고 복잡 미묘한 오스트리아 빈의 부르주아 계층(bourgeoisie)의 태도와는 다른 태도를 이어받았습니다. 로스는 드레스덴에서 교육받은 후 지식과 견해를 넓히기 위해 미국에서 넘어가서 3년 동안 수학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시카고 건축 학파(Chicago school)에 자신을 소개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시카고에서 그는 "루이스 설리번" 등의 건축가와 시카고 건축의 근대성에 많은 영향을 받은 이후 1896년에 오스트리아 빈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돌프 로스는 당시의 예술과 건축은 혼란에 처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건축은 기능적인 의도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의 내용에 의해 결정되고 객관화되어야 하는 것이고, 예술은 그 역할과 가치가 어떤 기능적인 요구에도 대응하지 않고 개인적이어야 함에 반해 건축은 사회적 요구에 반응해야 한다."라고 여겼습니다. "예술은 예술가를 위한 개인적인 문제다. 집과는 다르다."라고 그는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그의 주된 목표는 본질적 요소와 비본질적 요소 사이의 차이점을 인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능과 형태는 본질적이며, 장식성은 비본질적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장식을 반대한 로스였지만, "후기 모더니즘(later modern)"의 이론가들만큼 장식 전체를 포기하는 것을 바란 것은 아닙니다. 그는 단지 장식성, 기능, 구조가 적절히 비례를 유지하도록 바랬던 것입니다. 그는 합리적인 방법으로 건축 계획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의 태도와 작품들은 합리적이라고 평가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취향에 기초한 환상이기보다는 건물의 관계와 요구에 따라 건물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1897~1898년 당시 오스트리아 빈에서 절정에 있었던 "아르누보 운동"을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이후 1922~1927년에는 파리에서도 생활하였다가 다시 오스트리아 빈으로 돌아간 다음 그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아돌프 로스의 건축 철학

    아돌프 로스가 미국에서 돌아왔던 1896년 오스트리아 빈은 아직 대개혁 운동(great renovation effort)의 영향 하에 있었던 시기로 당시 빈의 기념비적인 "링슈트라세(Ringstrasse)"의 건설과 도시 계획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이 도시 계획은 오스트리아 빈을 파리(Paris)와 같은 수준으로 만들어 놓으려는 목적에 더해 헝가리 제국의 정당성을 위해 계획된 도시 계획이었습니다. 이 건설은 당시 빈에서 유명한 건축가였던 "요제프 올브리히(Olbrich)"와 "요제프 호프만(Hoffman)"이 주도하였던 오스트리아 빈의 "아르누보(art nouveau) 운동"이었습니다. 아돌프 로스는 교리적이고 열정적인 이 아르누보 운동을 보잘것없고, 쇠퇴해 가는 부르주아 근성이라고 맹렬히 공격과 비난을 했습니다. 아돌프 로스는 아르누보를 근대 문명이나 고도 문명에 비해 무가치하다고 평가했었고, 그 대신 건축의 다른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생활수준이 낮으면 낮을수록 장식은 더욱 번성한다. 장식의 의존에서 벗어나 형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이 갈망하는 목표다", "장식은 죄악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모든 장식을 피하고 면의 분할과 아름다운 재료를 도입하는 건축" 양식을 추구했습니다. 아돌프 로스는 "장식의 사용은 더 이상 오스트리아의 문화와는 연관되어있지 않으며, 장식의 사용은 단지 쇠퇴의 표현이 되어버렸다."라고 여겼습니다. 당시 앵글로 색슨(Anglo-saxon) 족이 강력한 기능주의 운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이런 측면에서 아돌프 로스는 앵글로 색슨족이 자신의 나라보다 훨씬 더 견실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장식성에 대한 열정을 "lavatory walls-화장실 벽"에 비유하기도 했었고, 범죄자들의 장난스러운 문신과 그들의 반사회적인 경향 사이에 명확한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아돌프 로스의 건축 작품들

    아돌프 로스는 비교적 몇 개 안 되는 적은 수의 건축물들을 설계했지만, 그의 작품들은 확실히 선구적이었습니다. 1910년에 그는 오스트리아 빈에 "슈타이너 하우스(Steiner House)"를 설계했는데 그 건축물이 근대 건축의 첫 번째 실증 사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아돌프 로스는 그의 저서에서 그가 표현했던 것처럼, 새롭고 순수한 재료로 "철근콘크리트"를 사용했습니다. 이 건물의 외관이 단순합니다. 당시에 흔했던 경사 지붕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건물 내부 역시 단순한 색채와 심플한 가구들을 배치하였습니다. 아돌프 로스는 "건축물은 그 고유 기능에 일치하게 지어져야 한다."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후에 그는 "다다이즘"의 아버지로 유명한 "트리스탕 차라(Tristan Tzara)"의 주택을 설계했고, 마지막으로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뮬러 주택(Muller house, 프라하, 1930)"를 설계했습니다. 아돌프 로스의 건축 이론들은 당시 오스트리아 건축 교육에 반해 반 아카데미적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그의 건축 이론들을 무의미하게 말하거나 창조해 낸 것은 아닙니다. 당시 지나치게 장식적이었던 오스트리아 빈의 건축물들, 당시 건축 흐름에 대항해서 "기능, 구조, 미의 조화를 추구"했던 아돌프 로스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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